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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연방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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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고대 러시아

9세기 초반 바이킹 족으로 알려진 스칸디나비아 인이 발트 해를 건너 동유럽에 정착하였다. 바이킹 족의 지도자는 862년에 자민족을 볼호프 강변의 노브고로드 시로 이끌고 간 전설적인 용사 류릭이었다. 류릭이 무력으로 그 도시를 점령했든지 아니면 그 도시의 지배자로 자연스럽게 추앙되었든지 간에 그는 이 도시를 크게 발전시켰다. 류릭을 계승한 올레그는 노브고로드의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시켰다. 882년에 올레그는 드네프르 강을 따라 5세기경에 발생한 슬라브족의 도시인 키예프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여 키예프 루시를 건설했다. 올레그의 키예프 지배권 획득으로 그 지역에 최초의 통일된 왕조국가가 확립되었다. 키예프는 스칸디나비아와 콘스탄티노플, 키예프 루시를 잇는 무역로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그 후 300년 동안 번영했다.

한편, 국교를 정하기로 한 블라디미르 공후는 여러 가지 종교를 신중하게 고려한 후 그리스정교로 국교를 결정하고는 콘스탄티노플 및 서유럽 국가와 동맹을 맺었다. 블라디미르가 이슬람교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이유는 음주를 금지하는 종교 아래서는 자국민이 생활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블라디미르에 이어서 야로슬라프 무드르이(현자)가 지배권을 장악했는데, 이때 키예프 루시는 황금기를 구가했다. 야로슬라프는 법전을 편찬하고 다른 국가와 유리한 동맹을 체결하고 예술을 장려하는 등 지혜로운 군주가 하는 각종 과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야로슬라프가 죽은 지 불과 수십 년 만에 키예프 루시는 내분에 휩싸였고 지역별 세력 중심지로 분할되었다.

몽고의 침략과 모스크바의 등장

키예프 루시는 13세기까지 어렵게 버텨 나갔지만 결국 몽골의 침략에 의해 붕괴되었다. 1237년 칭기스칸의 손자인 바투칸은 볼가 강 하류의 지역(현재의 카잔)에서부터 키예프 루시를 침략했다. 그 다음 3년에 걸쳐 몽골(혹은 타타르)는 키예프 루시의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를 제외한 모든 주요 도시를 파괴했다. 지역 영주가 폐위되지는 않았지만 타타르 국가에 정기적인 공물을 바쳐야 했다. 이 기간 동안 러시아는 서유럽으로부터도 침략을 받았는데, 먼저 스웨덴 민족으로부터(1240년) 그 다음엔 리보니아 족의 군사동맹체로부터(1242년) 침략을 받았다. 결국 양 침략세력은 노브고로드의 영주이자 러시아의 위대한 용사인 알렉산드르 넵스키에 의해 격퇴되었는데, 이 이름은 그가 네바 강변에서 스웨덴 민족에 승리를 거둔 데서 유래되었다.

타타르 민족이 남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북동쪽의 도시는 점차 더 커다란 영향력을 얻었다. 트베르에서 시작하여 14세기를 지나면서 모스크바가 그러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모스크바는 러시아 정교회 대주교의 자리를 부여 받았으며 러시아의 정신적 수도가 되었다.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모스크바는 타타르 족을 직접 대적할 만큼 강력해졌으며, 1380년에는 모스크바 공후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대담하게도 타타르 족을 공격했다. 2년 후 타타르 족의 보복으로 모스크바가 다시 점령되었지만, 돈스코이가 쿨리코보에서 거둔 승리는 즉각 그를 대중적인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로부터 1세기 후인 1480년에 이르러서 모스크바는 타타르족의 지배를 벗어날 만큼 강력해졌다. 그 당시 지배자는 이반 대제로 더 잘 알려진 이반 3세였다. 이반 3세는 모스크바의 주변 도시를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타타르 족에 바치던 공물을 중지했고 공국 전체를 효과적으로 지배했다. 이후 그의 손자인 이반 4세(이반 뇌제)의 시대에 와서 러시아는 통일된 국가를 형성했다. 1533년 그의 나이 불과 세 살밖에 되지 않았던 이반 뇌제는 아버지 바실리 3세를 계승하여 모스크바의 대공이 되었다. 1547년 마침내 그는 차르(황제)의 칭호를 채택하고 귀족 세력을 물리쳤으며, 군대를 재편하고 타타르 족을 쳐부술 준비를 갖추었다. 1552년 그는 카잔을 정복해 수중에 넣었고,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도 정복함으로써 세력을 잃어가고 있던 황색 유목민족을 격퇴했다. 이반 뇌제의 군사행동은 러시아의 팽창을 위한 새로운 거대영토의 개척으로 이어졌는데, 시베리아 정복과 식민지 건설이 시작된 것도 그의 통치 시기부터였다. 이반 뇌제는 치세 초기에 전혀 폭정을 일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그의 성격이 난폭해졌는데, 1560년대에는 귀족세력에게 끔찍한 일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귀족의 토지를 몰수했고 자신을 불쾌하게 하는 귀족들을 처형하거나 추방했다. 1581년에는 화가 난 나머지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를 쇠몽둥이로 때려 죽이기까지 했다.

1584년 이반 뇌제가 죽은 후 그의 아들 표도르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표도르는 독재적인 지배에는 전혀 맞지 않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표도르는 공국 대부분의 지배권을 자신의 매부인 보리스 고두노프에게 맡겼는데, 고두노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왕위찬탈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1591년 그는 고대 도시 울리치에서 표도르의 동생 드미트리를 살해했는데, 오늘날 그 장소는 ‘피의 성 데메트리우스 교회’(Church of St. Demetrius on the Blood)가 있다. 1598년 표도르가 죽고 나서 고두노프는 황제로 등극하지만, 그의 통치는 결코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폴란드에서 드미트리로 자칭하는 한 청년이 나타났는데, 1604년에 그는 폴란드 세력과 함께 러시아를 침략했다. 이듬해에 보리스 고두노프가 갑자기 사망했는데, 이때부터 ‘수난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 8년 동안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가짜 드미트리는 폴란드 군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왕위를 요구했다. 하지만 1613년 폴란드 군대는 모스크바에서 쫓겨났으며 귀족계급은 만장일치로 미하일 로마노프를 황제로 선출했다. 로마노프 왕조는 그때부터 1917년 10월 혁명으로 제정러시아가 무너질 때까지 304년 동안 러시아를 지배했다.

로마노프 시대

로마노프 왕조는 출범 직후 몇 십 년 동안에는 러시아의 현상유지에 만족했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중앙집권화를 추진했지만, 당시 유럽 전역에서 진행되었던 경제-정치 분야의 급속한 변화를 러시아에 도입하는 데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러시아의 서구화 개혁은 표트르 대제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다.

1) 표트르 대제 (표트르 I세)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 40년간은 러시아에 또 하나의 큰 전환기였다. 대내적으로는 진보된 행정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영토 확장, 문호 개방 등 강력한 지위를 다져가게 되었다. 이 시대의 영웅인 표트르 대제는 1672년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나탈리아 키릴로브나 나리슈키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표트르는 어린 시절부터 군사훈련과 공격기술 등 전쟁 놀이를 좋아했다. 표트르는 형 이반이 죽자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런데 표트르는 모스크바에서 직접 통치하지 않고 장기간의 유럽여행에 나섰다. 그는 약 2년 동안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여러 왕들과 친교를 쌓았을 뿐만 아니라 신분을 감추고 여행을 하기도 했는데, 네덜란드에서는 선박 건조장의 목수로 일하기도 했다.

표트르는 서유럽의 산업기술과 국가통치에 관해 상당히 많은 지식을 축적하면서 러시아의 근대화와 서구화를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표트르의 권력 장악은 러시아에 태풍과 같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모든 남자에게 전통적인 모스크바 식 복장을 금지했으며, 징병제도를 도입하고 기술학교를 설립하고 교회제도를 자신에게 적합한 종교회의로 대체했다. 또한, 그는 알파벳을 간소화하고 재판절차의 개선을 시도했으며, 칭호도 차르에서 황제(Emperor)로 바꾸고, 수많은 개혁 조치와 제한 사항, 새로운 구상들을 도입했다(이러한 모든 조치는 보수적인 성직자에게 표트르가 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했다). 1703년 표트르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작정하고 핀란드 만의 늪지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그 후 9년에 걸쳐 엄청난 인명과 물질적 비용을 들여 상트 페트르부르크가 건설되었다.

표트르는 1725년에 사망했다. 그는 러시아의 역사에서 가장 논란을 일으킨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그가 러시아를 근대 유럽의 새로운 강자 가운데 하나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개혁이 일반대중의 생활을 크게 개선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남아 있다. 그가 러시아의 군대와 행정구조를 근대화시킨 것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개혁에 필요한 비용은 소농의 희생을 통해 조달되었고, 소농은 어쩔 수 없이 점차 농노로 전락했다. 표트르 사망 이후 짧은 기간 동안 러시아에서는 여러 명의 지배자가 부침했는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깊은 인상을 남길 만한 기회를 갖지 못했다. 표트르 개혁의 많은 부분은 러시아에 뿌리를 내리는 데 실패했으며, 러시아를 유럽의 거대 강국으로 만들고자 한 그의 희망은 사실상 예카테리나 여제에 의해서 실현되었다.

2) 예카테리나 여제 (예카테리나 II세)

예카테리나 2세가 러시아를 통치한 1762년부터 1769년까지의 기간은 러시아 역사에서 커다란 전환기였다. 여제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이 낳은 결실을 반세기에 걸쳐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여 발전시켰다. 여제의 외교술은 걸출한 외교가들이 많았던 당대에서 볼 때도 놀라운 것이었다. 동-중부 유럽을 포함한 유럽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러시아가 미쳤던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에르미타쉬 박물관을 건립했고 러시아 전역에 걸쳐 많은 건물을 지어 학술기관, 저널출판, 도서관으로 사용하게 했으며, 프랑스의 백과전서파인 볼테르, 디드로, 달랑베르 등과 서신을 교환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예카테리나는 눈에 띄게 보수주의적으로 돌변했는데, 자신의 정책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점점 적대적으로 돌아섰다. 예카테리나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부터 죽을 때까지 통치 초기에 가졌던 여러 가지 자유주의적 개혁을 폐기했다. 결국 예카테리나도 표트르 대제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농민의 상태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스스로의 파멸을 불러온 러시아 침공을 결행했는데, 이 사건은 파국적 결과를 기록한 전쟁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것이었다. 유럽 대륙 전체는 사실상 나폴레옹의 통제 아래 놓여 있었는데, 러시아 침공은 알렉산드르 1세를 다시 굴복시켜 4년 전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강요한 조약을 이행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모든 속국에서 50만 명에 달하는 병사를 징발한 나폴레옹은 그 어느 때보다 큰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로 진격했다. 쿠투조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 군대는 계속 후퇴하면서 프랑스 군의 측면을 쉴새 없이 괴롭히는 전략적 후퇴라는 방어작전을 펼쳤다. 여름이 지나면서부터 나폴레옹의 보급로가 훨씬 더 취약해졌고 군대의 사기도 저하되기 시작했다. 9월이 되자 프랑스군의 규모는 치열한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한 채 피로와 굶주림, 탈영, 러시아 군의 습격 등으로 2/3 정도로 줄었다. 9월 7일 모스크바에서 70마일(110km) 떨어진 곳까지 접근해온 프랑스 군은 보로디노에서 러시아 군과 마주쳤다. 이 전투에서는 10만 8천명이 죽었지만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는 못했다. 쿠투조프는 갑자기 모스크바 시민의 대규모 소개를 지시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리하여 9월 14일 나폴레옹의 군대가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도시는 텅 빈 상태였는데, 보급품이 떨어진 데다 다가오는 엄동설한을 견딜 방한 수단도 태부족이었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일은 그 날 밤 도시에 화재가 발생하여 다음 날 프랑스 군대가 추위를 피할 은신처조차 찾기 힘들게 된 상황이었다. 협상을 위해 알렉산드르 1세에게서 모종의 소식을 기다려봤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자 나폴레옹은 본국으로의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1만 명에 불과했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나폴레옹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러시아는 나폴레옹 이후 유럽에서 열강의 지위를 차지했다. 나폴레옹 시대 이후 러시아는 더욱더 강력한 국가로 부상했지만, 다른 한편 러시아 내부의 긴장도 점점 고조되었다.

러시아 혁명 전·후

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을 일으킨 일단의 개혁적인 젊은 장교들은 니콜라이 1세의 즉위를 막고 러시아에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병력을 동원했다. 그 시도는 전적으로 실패했으며 니콜라이 1세는 유럽에서 가장 반동적인 군주가 되었다. 니콜라이 1세를 계승한 알렉산드르 2세는 전임자와는 대조적으로 개혁을 받아들이는 듯이 보였다. 1861년에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를 폐지했지만, 농노해방은 비참한 농민의 현실에 있어서 실질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러시아의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정치체제는 더 큰 변화를 겪었다. 더욱 많은 자유를 얻기 위한 하층계급의 시도는 무정부 상태에 대한 우려를 낳았으며, 따라서 정치체제는 대단히 보수적인 상태로 유지되었다. 러시아가 더욱 산업화되고 영토가 확대되고 훨씬 더 복잡해짐에 따라 전제적인 차르 지배체제의 모순성은 점점 더 분명해졌다. 20세기에 이르러 중대한 격변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한편, 러시아의 영토와 세력은 19세기에 걸쳐 크게 팽창했다. 러시아의 국경은 아프가니스탄과 중국에까지 이르렀으며 태평양 해안의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러시아는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톡과 아더항을 건설하여 상업에 유리한 통로를 개척했으며, 시베리아 횡단철도(TSR; 1891∼1905년에 건설)의 건설로 유럽 러시아 영토와 새로이 획득한 동쪽의 영토가 연결되었다. 1894년 니콜라이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유능한 정치 지도자가 아니었으며 그의 신하들은 거의 한결같이 반동적이었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러시아가 점점 더 극동으로 세력을 확대함에 따라 일본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킨 일이었다. 1905년 1월 일본의 공격으로 촉발된 러일전쟁의 패배로 말미암아, 이미 평판을 잃은 니콜라이 2세는 거의 모든 지지세력을 상실했다. 니콜라이 2세는 헌법과 의회(두마)를 도입하는 등 개혁세력에 대한 양보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개혁운동의 힘은 러시아의 내의 새롭고 강력한 세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주요 도시의 산업화와 바투 석유지대의 개발은 러시아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집중시켰으며, 그들은 곧 지역정치평의회 즉 소비에트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니콜라이 2세로 하여금 1905년의 개혁조치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한 것은 대부분 사회민주당의 깃발 아래로 통합한 소비에트 세력이었다.

일본과의 전쟁이 종결된 후, 니콜라이 2세는 자신의 굴욕적 양보를 철회하고자 했으며 그의 정부는 전보다 더욱 반동적으로 되었다. 대중의 불만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니콜라이 2세는 강경한 진압을 통해 지배를 유지했지만, 대중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912년 사회민주당은 급진적인 볼셰비키와 상대적으로 온건한 멘셰비키라는 두 개의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1914년 또 다른 불운한 전쟁이 다시 한번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러-일 전쟁은 커다란 희생을 초래한 인기 없는 전쟁이긴 했지만, 적어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러시아 서쪽의 인접국가에서 일어났다. 군사적으로나 산업적으로 준비를 갖추지 않았던 러시아는 패배를 경험하면서 사기를 잃었으며 심각한 식량부족을 겪고 곧 경제붕괴를 경험했다. 1917년 2월에 이르러 노동자와 병사들의 불만은 혁명으로 이어지기에 충분했다. 당시 페트로그라드라고 불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그곳의 주둔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노동자 소비에트가 결성되었으며 두마는 수도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수립을 승인했다. 니콜라이 2세가 지지를 상실했다는 사실이 곧 분명해졌으며, 3월 2일 그는 자신의 동생 미하일에게 왕위 이양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임을 직시한 미하일은 다음날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두마의 승인을 받아 결성된 임시정부는 온건한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질서회복을 주장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개혁을 약속했다. 그러나 두마는 전쟁의 즉각적인 종결이라는 소비에트의 가장 긴급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했다. 그 후 9개월 동안 임시정부는 권력을 확립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볼셰비키는 불만에 가득 찬 소비에트로부터 점점 더 많은 지지를 확보했다. 10월 25일 레닌이 이끈 볼셰비키는 겨울궁전으로 밀고 들어가 케렌스키 정부를 물러나게 했다. 볼셰비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았지만, 전국적인 통제권은 확보하지 못했다. 그들은 러시아를 전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 성공했지만,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러시아 전역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볼셰비키가 1920년에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기까지 10월 혁명 이후 3년 동안 러시아는 내전으로 황폐화되었다.

소비에트 시대

소비에트가 지배한 최초의 몇 년 동안은 유례없는 사회적•문화적 변화의 분출로 특징지어지는 시기였다. 내전 시기 동안 볼셰비키가 경제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유지했지만, 내전이 종결된 후 레닌은 시장경제로의 부분적인 복귀가 지난 3년간의 파괴로부터 러시아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NEP)은 상대적인 번영의 시기를 가져옴으로써 미숙한 소비에트 정부로 하여금 정치적 지위를 강화하고 인프라를 재건할 수 있도록 했다. 러시아는 여전히 수많은 도전에 직면했지만, 낙관주의적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1924년 레닌의 죽음은 공산당 내에서 권력을 둘러싼 광범하고 극히 분열적인 투쟁으로 이어졌다. 1920년대 후반 스탈린이 승자로 등장했으며, 그는 즉각 러시아를 아주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NEP는 중단되었으며 상부에서 명령하는 계획경제로 대체되었다. 농지는 집단화되어 국가가 운영하는 대규모 농장으로 바뀌었다. 산업발전은 비정상적인 속도로 추진되었으며 생산활동의 중심이 소비재 부문에서 자본설비 부문으로 전환되었다. 예술과 문학은 훨씬 더 엄격한 통제하에 놓여졌으며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진보적 에너지는 장중한 권위를 띤 소비에트 리얼리즘으로 대체되었다. 종교는 극심하게 억압되어 교회는 폐쇄되거나 파괴되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다른 용도로 전환되었다. 스탈린은 러시아 내의 당 정책에 대한 모든 반대파뿐만 아니라 당내의 모든 반대파를 숙청했다. 1930년대 말, 소연방은 예전의 어느 때보다 대중의 삶이 더욱 엄격하게 규제되는 국가가 되었다. 이제 실험은 끝났으며 통제가 일상의 규칙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소연방은 정치적 숙청, 군대 내의 많은 유능한 지도부를 상실, 그리고 민수생산에서 군수생산으로의 산업생산 전환은 느린 속도로 이루어지는 등 전쟁에 대한 준비가 미흡한 상태였다. 독일과의 불가침조약(1939년)은 잠시 동안 히틀러의 침략을 막는 데 기여했지만, 1941년에 소비에트는 갑작스런 공격을 받았다. 그 해 말에 이르러 독일군은 서쪽의 소비에트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를 포위했으며, 모스크바에서 불과 수백 마일 떨어진 곳까지 진격했다. 러시아는 치열한 반격으로 독일군이 수도로 진격하는 것을 저지했지만, 1942년부터 독일군에 맞서 끝까지 저항하여 결국 11월에 러시아 군대가 독일군을 포위시킴으로써 전쟁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1944년에 그들은 독일군을 폴란드로 몰아냈으며, 1945년 5월 2일 마침내 베를린을 함락하였다. 나폴레옹 전쟁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소연방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친 후 전쟁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국가로 등장했다. 러시아는 엄청난 참화를 겪고 2천만 명 이상의 인명을 잃었지만 상당한 영토를 획득했으며 미국과 나란히 세계의 양대 초강대국 중 하나로 부상했다. 그럼에도, 러시아의 전반적인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공업생산은 또다시 중공업에 집중되고 농업의 실패는 광범한 기근을 유발했으며 정치적 자유는 훨씬 더 제약되고 또 다시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되었다. 냉전의 장기화와 군비경쟁의 심화에 따라, 인민의 생활조건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스탈린은 1953년 뇌출혈로 죽음에 이를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스탈린의 뒤를 이은 흐루시초프 시기에는 정치적 통제가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자신에 대한 반대파가 공산당 내에서 점차 세력을 확보함으로써 1964년에 축출되었다. 러시아의 역사적 전통과는 달리 흐루시초프는 조용히 물러날 수 있었다. 흐루시초프에 이어 브레즈네프는 1970년대 내내 소연방 공산당(CPSU) 서기장으로서 소비에트를 지배했다. 그의 집권기간은 국내적 안정과 공세적 대외정책을 분명하게 강조하는 시기로 특징지어졌다. 브레즈네프 집권기간 동안 러시아는 십여 년에 이르는 정체의 시기를 겪었다. 경직된 러시아 경제는 서서히 쇠퇴해 갔으며 정치적 분위기는 점점 더 비관적으로 변해갔다. 1982년 브레즈네프가 죽은 후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의 지위를 계승했으며 이후 체르넨코로 이어졌는데, 이들 양자는 중대한 변화를 시도하기에 충분한 기간 동안 생존하지 못했다. 1985년 3월 고프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을 때에야 개혁에 대한 긴급한 필요가 현실화되었다. 고르바초프의 소비에트 개혁은 글라스노스트(공개, 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잘 알려진 두 가지 개념으로 집약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신사고를 표방하면서 사회적-경제적 통제를 완화하는 등 전반적으로 새로운 분위기를 이끌면서 소비에트 경제를 재생시키려 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관료주의의 과감한 청산과 부패의 철저한 감시를 강조하면서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그러나 1986년 4월 소연방 정부가 체르노빌에서 발생한 악명 높은 핵 참사(러시아의 광범한 지역을 방사능 물질로 오염시킨 핵발전소 폭발)를 수일 동안 숨겼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글라스노스트는 신뢰성을 상실했다. 체르노빌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고르바초프는 모든 신문기사에 대한 통제를 철폐하는 조치를 내놓았다. 이때부터 소비에트에 신선한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수십 년에 이르는 소비에트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각종 문제가 공개적인 대중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빈곤, 부패, 자원의 비효율적인 관리, 아프간 전쟁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그 외의 각종 문제가 들추어지고 불만이 제기되었다. 모스크바의 새로운 지도자인 옐친을 비롯해 급진적인 개혁파 지도자가 등장했으며 사하로프와 같은 유명한 반체제인사가 처음으로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소연방 정부는 각종 비판의 표적이 되었지만, 더 이상 어떤 조치를 취할 수도 없었으며 사태의 흐름을 그대로 수용할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1989년 초 소비에트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1989년 봄에는 최초로 인민대의원대회 대의원에 출마한 복수 후보에 대한 선택을 허용하는 공개 선거가 실시되었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민주화 혁명이 이어졌고, 이는 베를린 장벽 붕괴로 그 절정에 달했다.

1990년 소연방은 스스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각 구성공화국들이 독립을 선언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공화국에서는 옐친이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독립 움직임을 주도했다. 대규모 파업이 발생하여 공산당이 노동계급의 대표기관이라는 전통적인 주장에 타격을 가했다. 정부와 당에 반대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경제상황은 악화되고 식량부족은 심각해졌으며 범죄 발생률은 급격하게 증가했다. 고르바초프는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대중의 요구와 엄격한 통제의 재실시를 주장하는 당의 요구 사이에서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1991년 여름 급진적 개혁운동은 정부를 공개적으로 무시할 만큼 강력해졌다. 고르바초프에 대한 언론의 비판이 강화된 반면, 옐친이 6월의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8월 18일 당의 보수파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필사적인 모험을 감행했다. 국방장관 야조프와 부통령 야나예프가 이끄는 세력은 고르바초프를 크림반도의 휴양 별장에 억류했다. 다음 날 아침 쿠데타 지도자들은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고르바초프가 사임했다고 발표했다. 신정부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군대가 파견되었지만, 옐친과 각 공화국 대통령이 이끄는 엄청난 대중적 저항에 직면했다. 결국, 3일 후 쿠데타 기도가 좌절되고 고르바초프가 복귀하였지만 이미 그의 위상은 허울뿐이었다. 그 해 말 소연방은 투표를 통해 소멸되었으며 독립국가연합(CIS)으로 대체되었다. 마침내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소연방 대통령직을 사임했으며, 12월 31일 자정 크렘린 꼭대기의 소비에트 국기는 러시아의 삼색기로 바뀌었다.

20세기 러시아 – 옐친 대통령 시기

1991년 12월 26일 소련의 공식 해체로, 러시아는 구 소련 구성국의 연합체인 독립국가연합(CIS) 가맹국의 하나가 되었다. 러시아는 구 소련이 가지고 있던 국제적인 권리(상임이사국 등)와 국제법상의 지위를 계승했고, 강대국으로의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국명은 1992년 5월, 연방 조약에 의해서 현재의 ‘러시아 연방’ 국명이 최종 확정되었다(러시아 연방의 국명 변경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사임의 당일인 1991년 12월 25일, 당시의 러시아 최고 회의 결의에 따른 것이다). 보리스 옐친은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60% 이상을 득표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시기 러시아 연방의 목표는 안전보장의 확보와 경제개혁의 추진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러기 위해서 러시아는 자국 영토의 온전한 보전을 위해 옛 소련 구성 공화국들과의 우호적 관계 유지와 함께 서방국가로부터 개혁에 필요한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이들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구했다. 그러나 서방과의 관계 개선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러시아는 독자적인 관계를 중요시하는 근린외교를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옐친 시대의 대외정책은 일관성을 결여한 채 과도기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서구의 협조와 독자적 행보 사이에서 방황하며 국제적 위상과 국익은 침식되었고, 결국 국력 약화를 초래했다. 1999년 12월 31일 옐친은 건강문제와 후진 양성을 이유로 푸틴 총리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지명하고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21세기 러시아

1) 푸틴 대통령 시기 (집권 1·2기)

12월 31일 옐친이 사임하면서 2000년 3월 26일 실시된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권한대행 푸틴은 52.9%의 지지율로 러시아 연방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강력한 러시아 재건'을 기본 정책 목표로 하여 법과 질서 회복을 통한 정치안정과 경제성장을 위한 구조적 개혁 달성으로 국민생활 수준의 향상을 추구하였다. 금융위기로 급격히 악화된 경제상황, 올리가르히의 막대한 정치, 경제적 영향력 및 중앙과 지방간의 단절 심화 등의 악조건에서 집권 4년 동안 러시아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2004년 3월 14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푸틴은 71.31%의 압도적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대선 직전 푸틴은 행정부 내 구 옐친계의 수장이며 친 재벌 (올리가르히) 성향을 보여온 카시야노프 총리 및 추종 관료들을 전격 경질하고 개혁성향의 프라드코프 내각을 구성함으로써 집권 2기에 독자적 국정 운영 의지를 천명하는 한편, 정부효율성 제고를 위한 행정 개혁 단행했다. 러시아 국민들은 집권 기간 중 정치적 안정과 경제개혁, 내수확장 및 고유가 등에 힘입은 연 6%대의 높은 경제성장률 등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이를 바탕으로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한 푸틴 대통령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권력의 중앙집권화 과정에서의 나타난 권위주의적 정체, 부진한 사법개혁과 사회개혁에 대한 대내외적 우려도 적지 않았다.

2) 메드베데프 대통령 시기

2008년 당시 푸틴의 최 측근 중 한 명이었던 부총리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의 후계자로 최종 낙점되었다. 정부정책 기조의 유지 및 계승을 표명한 그는 푸틴의 전폭적 지지로 2008년 3월 2일 실시된 대선에서 70.24% 득표율로 신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8년 4월 15일 제12차 ‘통합러시아’당 전당대회에서 당 의장 수임 요청을 수락한 푸틴은 동년 5월 8일 메드베데프의 총리지명안이 의회를 통과함으로써 실세총리이자 원내 다수당 의장으로서 국정 장악 기반을 마련하였다. 과거 푸틴 대통령 시절 구축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에 기반하여 외교-국방은 대통령이, 경제는 총리가 담당하는 이른바 양두체제의 막이 오른 것이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큰 틀에서 푸틴 총리의 정책노선 계승을 따르면서도, 부패척결, 시민사회의 성장, 선거제도 개혁 등을 추진하였다. 그는 2009년 9월 '전진 러시아! (Go Russia)'라는 제하의 기고문에서 러시아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당면과제 해결을 위한 국민들의 참여와 지지를 요청한 이래, ‘현대화(modernization)’ 노선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러시아 건설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 중이다. 현재 러시아는 2009‐10년 경제위기의 극복과 에너지-원자재 의존경제를 탈피하기 위한 종합적인 현대화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특히 에너지 효율성 제고 및 절약, 원자력 기술 제고, 우주기술 향상, 의료기술 제고, IT 기술 발전 등의 5대 중점 과제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 현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 푸틴 대통령 시기 (집권 3기)

2012년 3월 4일 총리였던 푸틴은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63.6%의 득표율을 얻어 재선(3선)되었다. 하지만 야당 등 반(反)푸틴 진영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푸틴의 장기집권을 비판하고 있다.
같은 해 5월 6일 대통령 선거 운동이 끝난 후, 모스크바에서 반푸틴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약 8,000~20,000명의 시위자들이 모여 80명의 경찰과 대치하며 부상을 당하고 약 570여 명이 체포되었다.
푸틴 대통령은 취임 후 ‘강력한 국가권력 확립과 경제재건’ 및 ‘강대국 지위 회복’ 등의 국정목표를 점진적·적극적으로 추진하며, ‘권위주의적 정부로의 발전’이라는 국내외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국내적으로는 정치 안정 및 성장 경제를 유지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러시아의 위상을 제고시켜 왔다. 또한 대국주의(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대외적으로 자국의 국익을 중시하는 태도 또는 행동양식) 노선을 바탕으로 한 군수산업 발전, 우주개발, 극동시베리아 개발을 국정의 3대 중점과제로 추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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